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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선의 플로리스트 되기 1 ( 독일 유학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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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MoonHyunSun 댓글 0건 조회 4,126회 작성일 13-09-24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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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스트를 공부하게 된 동기와 유학을 결정하게 된 동기]

플로리스트 과정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을 1995년도이다.
그 전에는 정식의 교육 프로그램이 없었으며, 이 과정이 들어오면서 이론수업과 실기수업이 병행된 과정이
시작되었다.

그 전에는 거의가 실기 위주의 수업이었기 때문에 이론 교육 이라는 것은 거의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수업을 받으면서도 난 항상 예술 작품을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수업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예술에는 사실상 이론보다 창의성과 재능을 더 중요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업을 받으면서
나한테는 재능이 없다는 생각을 매번 했었던 것 같다.

내가 화훼 장식을 시작하게 된 것은 원예학과를 입학하면서부터였다.

식물에 관련된 학과를 가기를 희망하였기 때문에 처음에 과를 선택할 때 ‘조경학과’와 ‘원예학과’를 두고 많은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원예학과를 선택하게 되었다.

내가 학교를 입학한 91년도에는 정식 플로리스트 과정이 아직 없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꽃을 정식으로 접하기
시작한 과정은 우리나라의 사범과정이었다.

일주일 동안 사흘을 학원에 갔었고 일주일에 한 번식은 한국꽃꽂이를 배우고 나머지 이틀은 다른 나라의 장식을
배우게 되었다.

대학 4년 동안 사범 과정을 마친 뒤, 95년도에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플로리스트 과정이 들어오자, 난 바로 플로리스트 과정을 시작하였다.

독일의 문화도 이때부터 접하게 되었다.
독일로 유학을 가려고 한 것은 미리 계획 한 것이 아니었다.
1993년도부터 전시회나 에 참석할 목적으로 독일을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그 나라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였고
직접 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보통 유학을 가게 되면 사람들이 한결같이 “많이 힘들다.”, “많이 외로울 것이다.” 라는 등의 말을 많이 한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언어였다.

마이스터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약 1년반 정도 어학을 배우고 들어갔는데, 수업을 모두 제대로 이해하기라는 쉬운일이 아니었다.
특히 실습을 받으면서 잘 이해하지 못해 실수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실습을 받던 플라워샵의 플로리스트 마이스터는 좀 엄하게 가르쳤기 때문에 그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 점심시간만 되면 혼자 밥 먹으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렇겠지만 나 역시 어학원에서만 배운 표준 독일어를 가지고 일상대화를 한다는 것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우리 한국어도 정말로 전 국민이 표준국어만 사용한다면 그렇게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부산에 가면 부산사투리, 전라도에 가면 전라도 사투리가 있듯
독일 역시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사투리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표준 독일어만 가지고는 대화하기는 어렵다.
6월에 난 독일 퀠른 에 있는 플로리스트 마이스터 학교에 입학한 후의 첫 수업은 시간 경제학 시간이었다.
참고로 독일의 마이스터 학교에는 전공과목 외에 비전공과목이라 해서 경제학, 경영학, 통계학, 법학 등을 반드시 해야만 한다.

경제학 수업은 교장선생님께서 하는 수업으로 독일어 실력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 첫 수업시간을 너무나 긴장을 한 상태에서 들었다.

그분은 수업을 하시다가 중간중간 질문을 많이 하시는 편이었는데 15명의 학생 중에서 외국인이 나 혼자였기 때문에 어려운 질문 대신 간단한 것을 던졌다.


나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 결국은 내 옆자리 사람들이 설명해 주어 겨우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급우들이 웅성거렸다.

아마도 다들 ‘어떻게 저런 쉬운 말도 이해 못하면서 수업을 받을까’라고 생각을 한 것 같다.
난 너무 창피해서 수업시간에 집중 할 수가 없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기숙사로 돌아와 베란다에 앉아서 맥주 한 병을 마시고 있자 급우들이 한 둘씩 와서
내 주위에 앉아서 같이 맥주 마시면서 위로를 해 주어 너무 고마웠다.


그 다음날 수업, 그 다음날 수업…. 첫날과 마찬가지로 수업이 계속 되면서 난 잠을 거의 잘 수가 없었다.
내게는 그날 그날 수업한 것을 다 이해하기에도 너무 벅찼기 때문이다.
그 날 수업한 내용을 복습하고 있으면 날이 새었고, 그럼 난 바로 수업을 들어가야만 했다.

게다가 우리 학교는 매주 작은 테스트가 항상 있었다.
첫 테스트 역사학이었다.
독일 친구들은 사실 거의 공부를 안 해도 볼 수 있는 시험이지만 난 시험 준비까지 해야 했기 때문에 잠을 잔다는
것은 거의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드디어 첫 테스트 시간. 모두가 주관식이었는데 난 한 문제도 쓰지 못했다. 단 한 문제도.

이렇게 개강 후 1주일을 보낸 뒤 생각을 바꿨다.
‘혼자서는 공부를 못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독일 애들은 개인의 사생활에는 거의 관여를 안 하기 때문에 내가 방에 들어가 있으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휴게실에 나와 있으면 모를까… 특히 난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더욱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 다음주 부터는 항상 내 방문을 열어두었다.
겨울에는 너무나 추웠고, 떠드는 소리 때문에 집중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난 잠자기 전까지는 방문을 항상 열어두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내 방을 찾아와 주지 않았지만 일주일 후부터는 학생들이 한두 명씩 들어와서 뭐하냐고
물어보면서 혹시 질문이 있으면 하라는 것이었다.

독일 애들이 스스로 자연스럽게 내 방에 오도록 성공한 것이다.
그때부터 독일친구들과 친해지기 시작했고, 교실에서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독일 친구들이 나를 도와주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학교에 잘 적응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친구들이 모두 좋았던 것은 아니다.
그 중에서는 나를 못살게 하는 친구도 있었는데 첫 시간에 앉은 자리가 자신의 고정석 이었기 때문에 그 친구는 졸업할 때까지 내 옆에 앉았다.

난 편지를 쓰면 그 친구를 꼭 마귀할멈이라고 별칭으로 불러서 썼던 기억이 난다.

그 친구는 항상 나한테 오면 “넌 마이스터 시험에 합격 못해. 알잖아. 근데 왜 이렇게 공부를 하니?” “포기해.” 라고 말하곤 했다.
기숙사에 있을 때도 그 친구도 역시 가끔 내 방에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안타까운 듯이 한번 쳐다 보고 나가는데…


나도 사실 독일 플로리스트 마이스터 시험에 합격할 것은 기대도 하지 않고 ‘학교만 무사히 졸업하자’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하루 수업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찼기 때문이다.


한번은 수업시간에 이해를 못해서 그 친구한테 물어본 적이 있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 설명 좀 해줘.’ 그 친구는 ‘넌 설명해도 몰라. 그냥 넘어가.’ 라고 말하고 모르는 척 했다.
그때 그 기분 정말 말로 표현을 못한다.

서럽다기 보다는 마음속으로 ‘악’ 이라는 게 생겼다. 어떻게 보면 너무 극단적이 표현인 것 같지만 난 그 친구가 나에게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속으로 ‘두고 보자’ 라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난 “꼭 합격해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라는 생각으로 정말 더 열심히 했다.
난 그 친구가 잠자기 전까지 절대로 먼저 잠들지 않았다.

그 친구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밤을 새면 난 공부를 하면서 밤을 샜다.
결국 그 친구가 우리학교 최고 우등생으로 졸업을 했지만 실기점수에서는 내가 이겼다.

실기점수는 내가 우리학교 최고점수를 받고 졸업 한 것이다.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에 도달하려면 반드시 목적을 만들어라 자의든 타의든.
정확한 목적이 없는 목표는 절대로 도달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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